무한도전 전시회 특집에서 유재석은 자기 자신의 무명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을 회상한 적이 있다.
"예전부터 참 많이 기도를 했어요. 자기 전에.
제가 이제 방송이 너무 안되고, 하는 일마다 자꾸 어긋나고 그랬을 때.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매번.
진짜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정말 한 번만.
진짜 단 한 번만 저에게 진짜 개그맨으로서 정말 기회를 주시면
이렇게 소원이 나중에 이루어졌을 때,
지금 마음과 달라지고 초심을 잃고... 만약에 이 모든 것이 나 혼자 얻은 것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생각을 한다면 정말 그때는,
정말 엄청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큰 아픔을 줘도 내가 단 한마디도,
'저한테 왜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나요'라는 얘기를 안 하겠다."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MC로서 전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연예인지만, 그 유명한 유재석도 무명시절이 있었었다. 그 힘든 시기에 유재석이 했던 기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갔었다. 필자도 MCAT을 두 번 보면서 늘 기도를 하곤 했었는데, 항상 같은 기도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견디기 너무 어렵고, 하루하루가 고달프고, 그냥 다 포기하고 싶지만, 끝까지 해서 먼 훗날 돌아봤을 때 나 자신이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시간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신다면 절대 자만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겠다고.
요즘도 이런 기도를 하곤 한다. 의대 원서를 다 넣고, 인터뷰만 기다리고 있는 와중 매일을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의대 지원생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을 불안함과 걱정되는 기간이고, 뚫고 가야 할 당연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만 가장 친한 친구들이 현재 주변에 없고 내가 쉽게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필자는 본인의 고민을 타인한테 쉽게 말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남한테 민폐를 끼치거나, 부담을 주는 걸 굉장히 싫어하고, 나 자신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고로 고민이나 안 좋은 일을 털어놔서 그 듣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거나, 쓸데없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는 것 자체도 딱히 원치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고민이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본인이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방식으로 풀어나갔었고, 당연히 부모님이 모르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았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성격도 워낙 내성적이어서 낯도 많이 가리고 말을 먼저 쉽게 못 꺼내는 경우가 일쑤였고, 그래서인지 고민상담 같은걸 친구한테 부탁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친구들은 항상 필자를 긍정적인 사람으로 생각해왔고, 필자도 그래서 늘 웃음을 주고 친구들한텐 좋은 이야기만 해왔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필자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좋은 사람들한텐 좋은 말만 해주고 싶었고, 걱정거리나 힘든 일들을 굳이 언급해서 그 관계를 어렵게 만들거나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확실한 건 필자는 긍정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관적이었고, 어떤 임무나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항상 걱정부터 먼저 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만 머릿속에서 그려나가고 있었다. 이 일이 잘 안되면 어떡하지,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내가 여기서 못하면 난 대체 뭐가 되지, 대충 이런 생각들로 누워서 잘 때마다 혼자 생각하고 그랬었다. 근심이 많고, 불안함이 많아서 그런지 일이 잘 풀릴 때도 의심을 하곤 했었다. 이게 대체 맞는 건가, 아니면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가.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여자친구한테까지도 고민을 안 털어놓는 미친놈이 다 있나 싶을 텐데, 솔직히 여친한테도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숨기는 건 아닌데, 물어보지 않으면 굳이 나서서 이걸 얘기해야 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뭔가 사귈 땐 즐거운 일만 있고 싶었고,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섰었다. 그리고 필자가 좋아하는 여친이 필자가 겪고 있는 어떤 힘든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었다. 한 번은 필자의 전 여친이 이거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필자가 한 말은 전 여친이 듣고 싶어 하는 답변이 아니었고, 이거에 대해 필자에게 많이 서운해했었다. 그 뒤로 좀 더 여유롭게 생각하면서 고쳐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긴 했다. 새 여친이 생기면 그래도 더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속마음을 더 쉽게 털어놓고 싶긴 하다.
최근에 필자는 대학교로부터 안 좋은 소식을 통보받았었다. 작년부터 Residential Advisor라는 대학교 선도부 같은 역할을 맡으면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억울한 일로 해고 통지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힘내라고 해주고 파이팅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줬지만 이거에 대해 편하게 털어놓고, 곁에 있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곁에 있어 달라 해주기도 미안했다. 결국엔 필자가 자초에서 본인한테 일어난 일이기에 남한테 이걸 들어봐 달라 맞장구쳐달라 하면서 필자 자신의 기분이 괜찮아지려 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 사촌 형한테 뜬금없이 연락이 왔었다. 최근에 소식이 없었고 오랜만에 이야기해서 그런지 정말 반가웠다. 형은 필자랑 나이 차이가 띠동갑이어서 멀면서도 되게 가까운 사이인데, 가끔씩 조언을 해주고 그러신다. 형은 필자의 정황을 모른 채, 카톡으로 그냥 몇 마디씩 던지셨다. 부담 갖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고, 졸업하고 나면 알겠지만 세상이 정말 넒다는 것. 학생의 신분으로서 할 거하고 안되면 다른 것 해보고, 친구들이랑 놀러 가고 싶으면 놀러 가고,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안 하도 된다는 것. 그리고 지금 필자가 겪고 있는 일들이 나중에 보면 다 별거 아니고, 될 일은 무조건 되고, 안될 일은 무조건 안된 다는 것. 기도와 간절함은 중요하지만, 일이 안 풀리더라도 기회는 많고, 필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우선이다라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에 노트북으로 형의 카톡을 읽고 있었는데, 뭔가 감정에 북받쳐 올랐던 것 같다. 그동안 시달렸던 압박감과 항상 잘해야 한다는 부담, 그리고 최근 안 좋은 일 때문에 받았던 좌절감 이런 게 복합적으로 필자를 힘들게 하고 있었는데 한 번에 이 감정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교수는 강의를 하고 있고, 옆에 학생들은 열심히 노트를 적고 있는 동안, 필자는 노트북 화면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항상 절실하게 기도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깨에 부담을 항상 짊어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유재석의 기도를 보면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간절함을 본받되, 매사에 부담을 가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번 글도 일기장 쓰는 느낌이 나서 뭔가 부끄럽긴 한데, 솔직한 심정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서 글을 올려본다. 감성팔이 글은 되도록이면 앞으로 피하려고 해보겠다. 몇 년 뒤면 이런 글들이 흑역사로 남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독자 중 만약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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