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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에모리 대학교를 입학한 게 마치 엊그제 갖지만, 이제 한국 나이로 스물넷인 필자도 졸업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으로서 인생에 대해 정말 많은걸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이것은 학업이나 취직 관련 및 연구나 전문 분야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사람을 보는 안목도 포함해서다. 더군다나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갑자기 힘들어진 상황을 기회로 이끌어 내는 방법도 터득해야만 했다.

지난날들을 마치 일기 쓰듯이 회상해보려고 한다. 처음 시작점은 바야흐로 2018년, 필자는 한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학교 기숙사에 처음 왔던 걸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부모님을 벗어나 집을 나왔다는 생각 만으로도 매일이 들뜨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워했었다. 학교에서 내 맘대로 밥 먹고, 축구하러 나가고, 밤새 공부하고, 술 마시고, 게임하고, 영화 보고, 온갖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이게 인생이구나 감탄했던걸 기억한다. 

1학년 때는 정말 파란만장한 해였다.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에모리 대학교로 오게 되었기에 처음 친해진 친구들도 같은 기숙사에 사는 외국인 친구들이었다. 덕분에 미국 대학교 전통 같은 fraternity party도 자주 갔었고, 외국인 친구들끼리 축구팀을 만들어서 아마추어 리그에서도 뛰었고, 술 마시러 근처 bar나 클럽도 재밌게 갔었던 기억이 있다. 클럽 갈 때 민증이 없어서 친구꺼 빌리다가 걸려서 입구 컷 당하고, 처음 혼자 술 마시다가 취해서 기숙사 화장실에 꼬라 박혀 밤새 토하고, 룸메이트가 매 주말 파티에서 돌아올 때마다 여자를 데려와서 졸지에 도서관으로 쫓겨나 밤을 지새우던 날들이었다. 어느 하루는 방에서 쫓겨 나와 도서관에서 밤에 혼자 컵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는데, 매주 여자를 데려오는 인싸 룸메이트가 그저 부럽고 그거에 비해 아무 보잘것없는 필자 자신이 너무 한심하단 생각에 갑자기 울컥했던 것도 머릿속에 남는다. 한마디로 그냥 병신 같은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땐 그런 거 마저 재밌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인들을 거의 모르고 살았었다. 에모리에는 한국인 학생들이 정말 많이 오는데 필자는 1학년 1학기때 만큼은 정말 미국인처럼 살았었다. 그래서인지 1학기가 지나고 나서부터는 슬슬 한국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었다. 에모리에 있는 여러 가지 한국인 단체도 알아보고, 어떤 동아리나 그룹을 들어가 볼까 생각하면서 고민을 했었다. 한국인 친구들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이 컸고 특히나 같이 운동이나 공부하면서 필자가 치는 드립을 잘 받아쳐주는 그런 친구들을 찾고 싶었었다. 그러면서 처음 만나는 한국인 여자 애들 한테도 나름 호감이 생기곤 했었었다. 하지만 필자를 받아주는 동아리는 딱히 없었다. 딱히 필자를 잘 아는 사람도 없었고, 친한 사람도 없었기에 어떻게 보면 필자를 조금 꺼려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있는 와중 필자는 인생 친구 세 명을 만나게 되는데, 성함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낯간지럽게 샷아웃 같은 걸 딱히 해주지 않아도 그 세 명은 이 필자의 글을 읽으면서 본인들이란 것을 알 것이라 믿는다. 한국인들끼리 만나서 뛰는 조기축구 동아리 같은 곳에서 만났는데, 정말 이 세 명이랑은 합이 너무 잘 맞았다. 그렇게 같이 놀고, 공부하고, 술 마시는 깐부가 되었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와서 느끼는 건 이 친구들한테 정말 고맙고 평생 챙겨주고 싶은 친구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 덕분에 공중파 방송이나 아프리카 비제이들로부터만 보고 느꼈던 요즘 한국 문화를 한층 더 잘 알게 되었고 필자가 오늘날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비록 청산유수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나름 꽤 괜찮은, 필력을 가지게 될 수 있었다.

스토리텔링을 하는 마당에 언급을 조금 더 하자면, 이 친구들은 의도치 않게 필자에게 뼈 있는 조언을 많이 남겼었다. 웃긴 건 그 당시 필자는 대부분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필자에게 에모리 한국인 공동체나 에모리 한국인들을 특히나 조심하라고 했었다. 착해 보이는 사람도 마냥 착하지만은 않고, 믿음을 줘도 될 것 같은 사람들도 결국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기적이고 철저히 개인주의인 사람들이라고. 그러면서 오히려 한국인들한테는 비교적 생소했던 필자의 프로필이 앞으로 학교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하면서 굳이 한국인들이랑 엄청 어울려 하고 싶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했었었다. 그 친구들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일 것이니 분명히 필자는 이 조언을 듣고 마음속에 새겼어야만 했는데, 그땐 필자는 본인은 해당이 안 될 거라는 생각으로 넘어갔던걸 기억한다. 이 생각은 나중에 필자가 4학년이 되고 나서야 부메랑처럼 돌아와 필자의 목을 넥 슬라이스 하게 된다.

2학년 1학기부터는 나름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전공에 대한 생각도 많이 좁혀졌었다. 필자가 에모리에 오기 전에는 전공에 대해서 뚜렷하게 생각을 하지 않았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전공을 고민하면서 어드바이저랑 상담을 했었는데, 분명했던 건 하나다. 일단 필자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점이랑 가오가 어느 정도 있어야 된다는 점이었다. 근데 남의 시선에 비중을 조금 더 크게 뒀었던 것 같다. 어떤 전공을 골라야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칭찬을 받을까, 어떤 걸 공부해야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을까라는 생각이 앞서서 정했던 전공은 Neuroscience/Behavioral Biology (NBB)였다. 일단 이름부터 뭔가 클라스 있고, 모르는 사람이 봐도 지적 있다고 감탄을 어느 정도 자아낼 수 있다고 판단을 했었다. 게다가 필자가 의사가 되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던 외할머니가 겪고 계시는 치매의 원인 및 솔루션에 대해 더 깊게 배울 수 있다 생각해서 이 전공이 매우 적합할 거라고 믿었었다. 덧붙여서 같은 학년 친구들도 이 전공을 추천했었고, 다들 좋아하는 전공이라 하기에 신뢰가 갔었다. 허나 이것은 흔히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다. 일단 수업이 너무 어려웠었다. 기초 전공 수업인 NBB 201에서 B+를 겨우 받게 되면서 전공을 섣불리 판단한 걸 한탄했고,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전공 때문에 학점을 희생하고 결국엔 의대 진학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멘탈이 아찔했었다.

이러는 와중 예상치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게 된다. 그러면서 대학교는 학생들에게 기숙사를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서 남은 학기를 보내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게 되는데, 필자에게는 마치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이었다. 집에서 사는 게 정말 지독하게 싫고 피하고 싶었던 필자는 어떻게든 에모리에서 남을 방법을 찾아 나섰었다. 대학교에게 여러 번 간절한 어필을 하자 다행히도 캠퍼스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학교를 떠나 군대에 입대했고, 필자는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대학교에 남게 되면서, 정말 고독하고 외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며칠 동안 사람을 단 한 명도 못 보면서 지내는 경우도 많았고, 처음에는 괜찮았던 필자도 외로운 게 왜 어려운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 초반에는 특히 먹고 지낼 수단도 많이 한정돼있어서 나름 쉽지 않았었다. 감사하게도 이때 필자를 챙겨주고 생각해주는 고마우신 선배분들도 계셨다. 그리고 이 당시에 알게 되어서 오늘까지도 매우 친한 친구들도 몇몇 있긴 했다.

코로나는 많은 이들한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필자 또한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던 건 분명했다. 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좋은 점은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학점이 엄청나게 떡상을 했다는 것이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미국 전체가 일처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비대면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으로 인해 모든 과제나 시험이 온라인으로만 제출이 가능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교수들은 온라인으로 점수를 매겨야만 했고, 이 말인즉슨 학생들은 미친 듯이 이걸 틈타서 학점을 쌓아나갔다. 모든 것이 컴퓨터로 가능하니, 여러 가지 변명거리를 통해 수업을 쨀 수도 있었고, 과제 제출하는 날짜도 자유자재로 변경할 수 있었다. 필자 또한 이걸 악용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거부하지는 않았다. 비대면인 만큼 몇 교수들은 학생들을 봐주는 면들이 많았고, 필자도 역시 이 사태의 수혜자로 볼 수 있다. 코로나 사태는 그래서 필자의 어려운 전공 수업의 학점을 많이 올릴 수 있게 해 주었고, 의대 진학에 있어서도 꽤 좋은 위치에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건 전국으로 엄청난 학점 inflation이 매크로 레벨로 일어난 것이었어서 의대들이 학점에 비중을 낮추게 됐다는 점이다. 그래도 학점이 낮은 것보단 어느 정도 깔고 가는 학점이 있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이 점은 코로나가 확실히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예전 글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2학년을 마치게 되면서 필자는 MCAT이라는 인생의 한 장을 마주하게 된다. MCAT이 사람이라면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주먹으로 20대 날리고 하루를 시작해야 마음이 편할 정도로 MCAT은 정말로 ㅈ같은 시험이다. 필자는 졸업할때까지 MCAT을 3수까지 하게 되는데 2년을 스트레스 받으면서 단 하루도 100퍼센트 편한 채 잘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3달 빡세게 해서 끝내면 될 줄 알았는데, MCAT의 CARS라는 영어 독해 섹션(원어민이 아니면 굉장히 큰 페널티) 때문에 점수가 계속 밑바닥을 쳤다. 최근에 졸업할 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던 필자는 굉장히 많은 시간을 이 ㅈ같은 시험 준비에 소비해야만 했다. 띵언 아닌 띵언을 하나 남기자면,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지만 MCAT이라면 배신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3학년이나 4학년때 아예 못논 것은 아니다. 3학년 때 이제 Residential Advisor(RA)로 일하면서 어느 정도 바빴던 시간이 있었던 반면에 4학년 1학기 때는 아예 고삐 풀린 마냥 정신없이 놀았던 것 같다. 4학년이 될 때 코로나도 어느 정도 풀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데, 필자 또한 아주 신나게 사람들을 주야장천 만나고 다녔다. 거의 매 주말마다 술자리는 기본이었고, 새로운 신입생들이랑도 계속 만나면서 뭔가 다시 코로나 예전처럼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들떠 있었다. "밤에도 뜨거운 여름 여자들이 이뻐"라는 래퍼 이센스의 가사처럼 매일 밤을 뜨겁게 놀았다.

하지만 그저 한순간일 뿐이었다. 뭐든 지나치면 사람에게 해롭다는 옛말이 결국 옳았던 것일까. 필자는 이때 삶에 첫 나락을 직감하게 된다. 시발점은 대학교로부터 RA직에서 잘렸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였다. 물론 대학교에서는 딱히 필자의 어느 한 잘못을 가지고 해고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필자는 그 당시 너무 방탕하게 놀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결과적으로는 필자를 어느 한 사람이 아니꼽게 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팩트지만 그래도 혼자 조용히 아무도 모르는 채 필자 할 일만 묵묵히 하면서 살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자신할 수 있었다. RA직으로부터 물러나자 필자는 돌연 잠적을 했었다. 술자리는 물론 거의 모든 SNS나 사람들 문자는 다 씹으면서 다시 공부에 열중했고, 마치 연예인들이 나락 가면 반성하고 기간 동안 자숙하듯이 필자 또한 그리했다. 그 뒤로는 그저 눈덩이 효과였다. 필자가 자리만 비우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말 믿었고 좋게 봐줬던 사람들이 필자의 뒷담을 까기 시작했고, 호의를 베푼 상대한테 필자 등이 칼에 꼽히게 되는 기이한 현상을 겪게 됐었다. 어이없기 짝이 없었고 사람들에 대한 후회감과 회의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는 이런 사람들이라고는 상종을 안 하리라고 굳건히 다짐했다.

여기에 별개 일로 필자가 예전에 그래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던 여자분이 필자의 행동 및 발언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되면서 결국엔 자기 기분이 상했다고, 필자를 정치질과 선동질의 대상으로 올리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조리돌림을 당했다" 라는 표현이 여기에 적절한 것 같다. 만약에 그 여자분 본인 혼자 기분 나빴던 거면 거기서 끝이 났어야 하고 손절한 관계로 마무리가 되어야 하는데, 갑자기 어느 한 한국인 단체 절반이 필자를 손절하고, 인스타로 언팔을 때리고, finsta(인스타 부캐)로 차단을 당하고, 이러는 경우는 그 여자분이 정치질을 야무지게 하고 다녔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터무니없고 소름이 돋았던 건, 실제로 필자를 잘 모르는 에모리 사람들도 필자에 대해 소문을 만들고 퍼트린다는 점이었다. 필자의 견해나 입장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않고, 어느 한 의견만 듣고 판단하는 사람들인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사람을 죽이는 잠재적 살인자들이다. 물론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것이 사실인 이유는 실제로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이런 비슷한 일들로 통해 자살을 택하는 학생들도 꽤 많기 때문이다. 아 이런 사람들이구나, 결국엔 자기 듣고 싶은 부분만 듣고 어느 한 시선에 휘둘려서 사람 죽이는 일에 일조하는 개새끼들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필자는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는지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굉장히 실망하고 믿음을 크게 잃는 시기였었다.

이때 필자의 친구들이 2학년 때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에모리 한국인 사람들을 조심해라,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고 했던 충고를 필자는 어리석게도 듣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당시 친구들이 해줬던 진심 어린 조언을 필자는 잊고 있었고, 이 대가를 뼈아프게 치르게 되는 지경까지 오게 됐었다. 친구들에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일들은 없었을 것이고, 필자 또한 나락을 피할 수 있었을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일들을 겪어서 직접 배우고 더 뼛속 깊게 느끼며 사람으로서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이긴 했다. 여기서 필자가 배운 교훈은 뇌리에 깊게 박혔다. 보통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배아파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본인 일에 집중을 못하고 열심히 살지 않는 나태한 자들 뿐이다. 자기 일에 충실하고 매일이 바쁜 사람들은 남 깎아내릴 시간조차 없다. 독자들도 누구를 손가락질하거나 깎아내리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되돌아봤으면 좋겠다. 내가 과연 남한테 뭐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 내가 그렇게 남보다 확연하게 대단한 사람인가? 독자가 예수님이 아닌 이상, 여기서 "예"라고 답변하기 어려운 게 정상이다. 

어찌 됐든 필자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난 후, 4학년 2학기를 별일 없이 조용하게 보내게 된다. 학기 내내 수업 열심히 듣고, MCAT을 공부하고, Senior Honors Thesis를 완성하게 된다. 술자리는 학기 동안 딱 두 번 나가게 되며, 그 두 번도 필자가 아끼는 후배들한테 필자가 겪었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 동생들이 필자가 겪었던 이런 일들에 안 엮였으면 하는 바라는 마음에 조언을 주려고 나온 부분도 있다(조금 꼰대 같지만). 그리고 알게 된 건, 안 좋은 사람들도 수없이 많지만, 좋은 사람도 꽤 많다는 점이었다. 학기를 보내면서 근근이 필자를 챙겨주고, 서슴없이 도와주는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그래도 있어서 그나마 버티고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분들한테는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졸업을 이젠 하게 되었다. 대학교 4년을 다니면서, 커리어에 대한 지식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의대를 앞둔 상황이니, 대학교를 통해 얻은 지식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떨리면서도 필자의 꿈의 한 단계 올라섰다는 마음에 기대가 되고 앞날이 마냥 걱정되지만은 않는다. 더더욱 중요한 건, 대학교를 통해 사람으로서도 많은 걸 깨달았고 4년 전 보다는 더 좋은 사람이 됐다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점이 아직 많지만, 예전엔 부정했었던 반면, 이제는 이걸 인지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성품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을 보는 안목도 생겨서 앞으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려운 일들이 그래도 줄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4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끝나고 누가 남았는가를 보았을 때, 그 사람들이야 말로 진실되고 필자의 진정한 친구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을 앞으로 유지하는 건 이제 필자의 몫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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